전통 수공예 기술은 계승되지만, 사람은 잊혀져 기록이 필요한 순간
“이제 손끝이 말을 안 해요. 눈도 침침하고요. 이젠 그냥 바라만 봐요.”
그 말을 꺼내던 옹기는 반쯤 지워진 목화무늬 앞치마를 매고 계셨습니다.
경북 봉화에서 42년 넘게 버선을 짜던 이순례 장인(가명)은, 한때 서울 백화점과 공공기관의 단체 주문을 받을 만큼 기술로 이름을 알렸지만, 지금은 외손주와 함께 사는 아파트에서 단 한 벌의 실도 잡지 않고 계십니다.
이렇게 손기술을 내려놓은 장인들이 전국 곳곳에서 하나둘, 삶의 말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전통 수공예 기술은 문화재로, 산업유산으로, 관광 콘텐츠로 계승되지만,
정작 그 기술을 수십 년간 묵묵히 다듬고 살아온 장인 한 사람의 ‘삶 그 자체’는 남겨지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일부 문화기획자와 지역 단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최근 들어 ‘전통 수공예 장인의 은퇴 이후 삶’을 기록하는 프로젝트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기술을 영상으로 남기거나, 공방 운영 스토리를 블로그에 적는 수준이 아니라,
그 장인이 살아온 생애의 리듬, 가족과의 관계, 은퇴 이후의 정서 변화, 일에서 놓인 몸의 감각까지
섬세하게 기록하는 ‘생애문화 구술사’에 가까운 형식으로 구성됩니다.
기술은 후계자에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을 지닌 한 사람의 생은 단 하나뿐이며, 그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는다면 기술만 남고 사람이 사라지게 됩니다.
살아 있는 문화유산의 마지막 페이지를 기록하다
이 기록 프로젝트는 전국에서 소규모로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강원도 평창에서는 국내 마지막 백자 나전화 장인이었던 고(故) 김철현 선생의 은퇴 이후 10년을
구술 인터뷰와 손기술의 퇴화 시점, 손 관절의 변화까지 3D 스캐닝으로 시각화하여 아카이빙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장인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장인이 기술을 놓는 시점부터 삶이 어떤 구조로 바뀌는지를 장기적으로 추적합니다.
김 선생은 작업을 그만둔 지 3년째 되던 해, “나무를 깎을 때는 손가락 마디마다 뇌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감각이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 속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한 마디는 기술이 육체에 각인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기술이 사라질 때 삶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장면을 담아낸 매우 중요한 기록이 되었습니다.
또한 전남 해남에서는 ‘염색장’으로 불리던 이영희 할머니의 일상 기록이 진행 중인데요.
이 프로젝트에서는 염색을 그만둔 후 색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퇴화해가는지를
작업일지·눈 건강 변화·색상 기억 테스트 등으로 측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애기록은 단지 한 사람의 회고가 아닌,
한 전통 기술이 어떻게 사람과 함께 생애 주기를 공유하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사례입니다.
무엇보다 이 기록은 후대 장인들에게 기술을 배우는 과정 못지않게, 기술을 내려놓을 때의 삶을 준비하는 방법을 안내해주는 ‘정신적 유산’으로 남습니다.
기술을 넘은 삶, 공방 밖의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전통 수공예 장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개는 “몇 대를 이어왔다”, “국가무형문화재다”, “손끝이 예술이다”는 수식어로만 기억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장인들의 일상은 그런 포장과는 거리가 멉니다.
경기 남양주의 초고장(草藁匠)이었던 정두환 선생은,
80세를 넘기며 공방을 정리한 이후 텃밭 가꾸기와 관절염 통증 조절이 하루의 주요 루틴이 되었습니다.
그의 하루는 여전히 일정했습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남아 있는 벼집을 손으로 만져보고,
햇살의 방향에 따라 말리던 버릇처럼 혼자 스스로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런 장면은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사라진 공백은 기술 전수 과정에서 생기는 '삶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후계자들은 기술만 받았지,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나 감정은 모릅니다.
기술은 몸으로 배우지만, 삶의 방식은 기록이나 관찰 없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들은 바로 이런 공백을 메우기 위한 목적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공방 바깥에서 시작되는 ‘은퇴 이후의 하루’를 살펴보면, 장인들이 자신에게 기술이 없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기술과 관련된 습관, 리듬,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기술의 연장이자, 살아 있는 문화의 지속입니다.
그리하여 이 기록은 단순한 생애기록이 아니라 ‘기술 이후의 삶이 기술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화 문서로 작용합니다.
장인 기록 프로젝트,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현재 이러한 기록 프로젝트는 문화재청이나 지역문화재단, 민간연구소, 혹은
공예 전문기획자들에 의해 소규모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국적인 시스템이나 매뉴얼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1:1 인터뷰 기반 장인 생애기록 아카이빙 키트’ 같은 방식도 실험되고 있습니다.
이 키트는 대학생 또는 지역 주민이 장인과 함께 대화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제로 자연스럽게 일지를 써나가는 방식입니다.
언제부터 손기술을 배우셨나요?
이 기술을 그만두게 된 계기와 시점은 언제였나요?
은퇴 이후 손이 가장 먼저 잊어버린 감각은 무엇이었나요?
기술을 그만둔 뒤에도 남아 있는 생활 습관이 있나요?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싶은 ‘기술 너머의 삶의 조언’은?
이러한 질문들은 단지 정보를 뽑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기술을 매개로 한 사람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인문학적 접근입니다.
특히 지역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직접 장인을 만나고 기록하는 활동은 ‘기술의 물려받음’을 넘어서
‘삶의 의미와 직업의 무게’를 새롭게 느끼는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생애기록 프로젝트가 제도적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기록을 단지 문화재 보존을 위한 서류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장인의 생애를 존중하고, 기술을 대하는 철학까지 보존하는 인문 콘텐츠로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기술이 멈추는 순간에도, 사람은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의 흔적을 기록하는 일은, 결국 전통의 완성된 문장을 끝맺는 유일한 쉼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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